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메이지 덴노 (문단 편집) == 천황으로서의 역할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Meiji Memorial.jpg|width=100%]]}}}|| || 성덕기념회화관[br]聖徳記念絵画館[br]([[도쿄도]] [[신주쿠구]] 카스미가오카마치 1-1) || 위에서 언급된 사건들로 인해서 일본은 명목상 천황 중심의 국가로 변모했으나 오랫동안 천황에게 실권이 없었던 탓에 대부분의 백성들은 천황이 주권자라는 인식이 없었다. 정부는 천황을 중심으로 한 국민 통합, 그리고 이를 통해 국민들이 신체제에 순응하길 원했다. 그래서 메이지 신정부는 법적으로 천황의 절대적인 권위와 신성함을 인정하고 [[1870년]], 신도의 국교화와 [[제정일치]] 선언과 함께 태양의 여신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천조대신)의 직계자손인 천황을 신격화하기 시작했다.[* 천황의 신격화는 이후 《[[대일본제국 헌법]]》 제1장 제3조에 '''천황은 신성하여 침해해서는 아니된다'''는 조항을 통해, 천황은 신성하며 법 위에 있다는 것을 공식화한 것으로 완성되었다. 이것을 '''천황대권'''(天皇大權)이라고도 한다.] 1871년에는 각 번주가 다스리던 지방을 천황이 직할하도록 했고, 1882년부턴 일본의 모든 군대가 천황의 군대로 규정되었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메이지 천황 은광 방문.jpg|width=100%]]}}}|| || 인나이 은광(院内銀山) 방문[* 메이지 덴노 우측 뒷쪽에 얼굴이 또렷이 확인되는 인물은 [[오쿠마 시게노부]]이다.] || 이러한 작업의 일환으로 메이지 덴노는 '''전국 순행을 자주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지방 순행을 자주 하면서 국민 통합 차원에서의 역할을 성실히 수행했고, 지방의 유력자들을 격려하여 그들이 민중 사이에서 권위를 갖게 하는 역할을 했다. 또한 '''덕치'''의 개념을 이용해 순행 중 재해를 입었거나 빈곤한 사람들을 볼 경우, 금전을 하사하거나 노인과 효자를 표창하여 국민들이 신체제에 순응하게끔 했으며, 서양식 군복에 칼을 차고 수염을 기른[* 실제로도 나이가 들고 나서는 수염을 길렀는데 이는 자신의 콤플렉스인 주걱턱을 가리기 위한 것이 컷다. 비슷하게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카를 5세]]도 주걱턱을 가리려고 수염을 길렀다.] 천황의 사진이나 초상화를 전국에 유포시켰다. 아무튼 이 덕분에 [[일본인]]들 사이에서 천황이 일본의 주권자이자 신성불가침한 존재라는 인식이 자리잡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천황 중심으로 국민 통합을 이루는 데 성공했다. 정치에는 거의 개입하지 않았으나 '중재자'로서의 역할을 했다. 《일본 근현대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책에 따르면, [[오쿠보 도시미치]] 내무경 사후에 일본 지도부 사이에 벌어진 혼란을 수습하는 데 메이지 덴노가 개입했다고 하며, <[[정한론]]>이 대두될 때 [[사이고 다카모리]]의 조선 파견을 중지시키는 과정에도 개입했다.[* 결국 사이고는 '''[[서남전쟁]]'''을 일으켰고, 그걸 진압한 건 메이지 덴노가 아니라 오쿠보 중심의 주류 개혁파였다.] 또 1893년 제국의회에서 예산안을 둘러싸고 불화가 생기자 [[이토 히로부미]] 총리가 메이지 덴노에게 중재를 요청했고, 천황은 궁정 예산의 일부를 내놓으며 관리의 봉급 일부를 납부해 예산을 보충하도록 조치시켰다. 이 외에도 의회 초기에 대립이 생길 때 종종 조칙을 내려 중재시킨 적이 있다고 한다.[* 이후 [[다이쇼 덴노]] 또한 이런 중재자로의 역할을 요청받았으나 정치에 염증을 느낀 다이쇼 덴노는 깡그리채 무시해버렸다.] 《[[대일본제국 헌법]]》 제1장 제1조에 의하면 >'''"대일본제국은 만세일계의 천황이 이를 통치한다."''' 고 규정되어 있으나 메이지 덴노는 정작 정치에 크게 개입하진 않았다. 사실 메이지 시대의 총리 중 한 명인 [[이토 히로부미]]는 천황이 정치에 개입하는 것을 최대한 막으려고 했고, 천황 본인도 정치에 관심이 별로 없었는지 신하들이 알아서 개혁을 추진하도록 묵인했기 때문에, 일본의 개혁·개방 과정에서 능력있는 신하들은 메이지 덴노의 방해를 받지 않은 채 개혁을 주도할 수 있었고, 그 결과 일본은 신속한 개혁을 거쳐 근대국가로 발전할 수 있었다. 결과만 놓고 보면 정치에 개입하지 않은 게 오히려 도움이 된 셈이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쇼켄 황후 독사진.컬러 사진.png|width=100%]]}}}|| || 정실 부인 [[쇼켄 황후]]의 독사진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200707292326288075.jpg|width=100%]]}}}|| || 메이지 덴노 부처의 그림 || 메이지 덴노의 정실인 [[쇼켄 황후]](하루코). [[일본 황실]] 최초로 서양식 의복을 입은 황후이다. 복장뿐 아니라 역할면에서도, 이전까지의 황후들과 달리 서구적&근대적 황후, [[퍼스트레이디]]로서의 면모를 보였다. 사진속의 책은, [[쇼켄 황후]]의 서양식 옷차림과는 대조적으로 전통적인 여성의 부덕(婦德)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